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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불 뮤직 아카데미에서 새로운 김창완을 발견하다!

글 : 음악저널리스트 이대화

레드불이 주최하는 음악 교육 ‘레드불 뮤직 아카데미 베이스 캠프 서울’이 9월 28일부터 나흘간 나비미래연구소에서 열렸다. 원래는 2주 동안 방대한 프로그램이 진행되지만, 이번 베이스 캠프는 4일로 압축해서 진행되었다. 래퍼/디제이 이집션 러버(Egyptian Lover)의 강연, 360 사운즈와 남사당패의 블록 파티 등 다양한 행사들이 열리는 가운데 산울림의 리더 김창완의 강연을 다녀왔다. 서울 행사임을 보여주는 자개 장식 로고와 한옥 공간이 눈에 띄었다.

그 시절에 이런 음악이? 새로운 김창완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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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강연에서 주로 다뤄진 내용은 김창완의 잘 주목되지 않아온 전자음악적 시도나 실험적 디테일이었다. 사회를 맡은 디제이 소울스케이프는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는 일반적 얘기보다는 김창완을 새롭게 발견하는 자리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고 실제로 그런 질문들을 던졌다.

강연의 하이라이트는 소울스케이프가 김창완이 프로듀싱한 현희의 1985년 곡 ‘슬픈 모습 보이기 싫어’를 틀었을 때다. 후렴구에서 악쓰는 비명 소리가 터지자 좌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1985년 한국에 이런 음악이 나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너의 의미’로 김창완을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더 충격이었을 것이다. 소울스케이프는 “클럽에서 이걸 틀면 다들 그렇게 좋아 한다”며 웃었다. “선생님이 이렇게 부르라고 시키지 않으셨냐”는 질문에 김창완은 “이렇게 비음악적으로 할 줄은 몰랐어요”라며 웃었다. 부끄러운 듯 귀를 막고 듣지 않으려는 제스처를 취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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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울림이 한창 음반을 내던 1970년대와 1980년대는 이런 파격이 제대로 대우받지 못한 시대였다. “1집 ‘아니 벌써’에 퍼즈라는 디스토션 계열 이펙트가 강하게 들어갔는데 (그때 사람들은) 그걸 다 노이즈인 줄 알았어요. 그래서 방송국에서 ‘잡음이 너무 많으니 소리 좋은 걸로 판을 바꿔달라’고 했어요. ‘원래 소리가 이런 거에요’ 설명을 해도 ‘원래 소리가 이럴 수 없잖아’ 이랬어요.”

음악이 시작한 후 3분 동안 보컬이 나오지 않는 ‘내 마음에 주단을 깔고’를 발표했을 때도 비슷한 에피소드가 있었다. “판이 나오고 방송에 처음 걸린 건 CBS 정오 (라디오) 프로그램이었어요. 김진성 씨라고 유명한 프로듀서가 있었는데 그 형님한테 갔더니 ‘새 판 나왔네? 빨리 줘 마지막 곡으로 틀어줄게’ 그리고 틀었어요. 틀었는데, 형 얼굴 색이 점점 고동색으로 변했어요. ‘야, 노래 언제 나오니’ 전주 나오다가 시보로 넘어갔어요.”

뭘 몰라서 가능했던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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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도발적 시도를 해외의 펑크 록, 사이키델릭 록에 영향 받았다고 분석하는 사람도 있다. 우연히도 산울림의 데뷔 년도인 1977년은 영국 펑크 록 전설 섹스 피스톨스(Sex Pistols)의 데뷔 년도와 같다. 소울스케이프는 당시 한국에서 펑크 음반을 구할 수 있었는지 물었다. 김창완은 아니라고 답했다.

“저희가 사이키델릭하고 펑크적인 요소를 가진 음악을 한 건 저희 형제의 무식의 소치지 뭘 알고 한 게 아니에요. 그런 음악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하고 만들었어요. 펑크 뮤지션은 대한민국에 소개된 밴드가 없어요.”

산울림이 도발적 음악을 할 수 있던 비결은 오히려 “음악이 뭔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삼형제가 그저 음악이 좋아 시작했기 때문에 정규 교육을 통해 자칫 잃을 수 있는 독특한 개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중엔 평가 받는 음악을 한 것처럼 소개가 됐는데, 사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배운 음악 지식이 다였어요. 그래서 음악이 뭔지 모르는 게 산울림의 시작입니다. 어떤 음악적 성향을 발견해내려고 하는 건 무의미해요.”

다만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심만큼은 끓어 넘쳤다. 펑크와의 공통점을 이야기하며 “이런 노래를 발표하면 어른들이 상당히 괴롭겠지 이 생각 하나로 만든 거에요” 말하기도 했다. 애써 만든 곡을 심의하는 제도도 싫었다. “그때 심의위원들이 악보 검사를 하는데 1화음으로 끝을 낸다든지 종결이 확실하지 않으면 애매한 뉘앙스가 있을지 모른다고 거부되는 사례가 있었어요. ‘그럼 이런 것들은 어떻게 심의가 나올까’ 해서 마디 구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쭉 악보를 써버렸어요. 마디를 다 없애버렸으니까 심의위원들이 어떻게 판단할까 했는데, 심의가 나왔어요. (웃음)”

구체음악과 미니멀리즘의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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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울스케이프의 진행은 탁월했다. 산울림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바탕으로 김창완의 널리 알려지지 않은 면모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현희의 ‘슬픈 모습 보이기 싫어’를 예로 들며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들어간다고 질문하자 구체음악(Concrete Music)의 영향을 털어놓기도 했다.

“이때 제가 콘크리티즘(에 영향 받았어요). 악기가 아닌 것들로 음악을 하고 싶었어요. 갖가지 주변 소리, 청계천 소음, 이런 걸 채집해 음악을 만들었어요. 현희 저 앨범을 프로듀싱할 때도 개인적으로는 그런 것들을 하고 싶었는데 아무 방법이 없었어요. 머리 속에만 있지 구현해내는 방법이 신통치 않았어요.”

영화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OST에 실린 1분 30초짜리 비트에 (‘분노’)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개인적으로 처음 듣는 그 곡은 마치 밝은 퍼커션을 쓰는 테크노 같았다. 이 전위적 시도에 대해 얘기하는 와중에 김창완의 비트에 대한 흥미로운 주장도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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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그 당시에 혼자 즐겨하던 게 뭐냐면 무작위로 소리를 채집해서 테잎으로 루프를 만들고 그걸 거꾸로 돌리는 거에요. 그러면 새로운 비트가 형성돼요. 비트라는 것이 먼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추후에 발생할 수 있겠다 싶었어요. 여기에 누드를 그려요. 몸의 선을 그릴 수도 있겠지만 배경을 칠해서 누드를 만들어낼 수도 있잖아요. 비트도 마찬가지에요.”

록 뮤지션인 그가 이런 전자음악적 시도를 즐기게 된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계기를 묻는 소울스케이프의 질문에 김창완은 “록에 대한 비판”이라고 답했다. 파격적이었다.

“록은 무엇이든 다 담아낼 것 같다는 상상을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는 록이 몰락하고 있었어요. 나도 록을 좋아하는데 록이 못 담아내는 게 뭐지? 그러다가 혹시 내가 (록의) 화려한 사고를, 레토릭한 사고를 하고 있는 것 아냐? 그렇게 생각했어요. 록의 수사적인 부분을 빼야겠다, 그래서 그런 사운드와 모티프를 찾기 시작한 거에요. 아주 간단한 사물을 그리고 싶었던 거에요.”

삶은 정답을 찾는 게 아닌 질문의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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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완은 인터뷰 동안 양손에 기타를 쥐고 있었다. 무려 두 곡이나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즉흥적으로 공수한 기타라 앰프가 없어 디제이 믹서에 연결해 연주했다. 한옥 마당 풀밭에서 작은 즉흥 콘서트가 벌어졌다. 목소리만큼 푸근하고 잔잔한 음악이 쌀쌀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줬다.

이날 자리에 모인 청중은 레드불 측에서 직접 초청한 한국의 인디 뮤지션들이었다. 한참 어린 후배들과 대화를 마치며 음악계 선배가 아닌 인생 선배로서의 조언도 아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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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2학년 때 하교 길에 지나가는 어른들한테 전부 물었어요. ‘누나 왜 사세요?’ ‘아저씨 왜 사세요?’ 그랬더니 대부분 ‘너도 크면 알게 돼’, ‘공부나 해’ 그런 대답을 했어요. 20년 정도 지나서 내가 성인이 됐을 때 얼핏 그 생각이 났어요. ‘그럼 나는 뭐라고 대답해줘야 하나?’ 근데 나도 똑같이 대답할 것 같더라고요. ‘쓸데 없는 생각 말고 공부나 해’ 그렇게 된 나 자신을 힐책했어요. 진짜 답을 못 찾겠더라고요. 그러다가 비상구를 찾았어요. ‘사는 건 그런 질문에 답을 구하는 기회가 아니고 그런 질문을 하는 기회란다.’ 그게 내 비상구였어요.”

그의 음악처럼, 마무리에 진한 여운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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